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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가즈오

꿈을 그리다
- 1962년 최초의 해외 출장으로 도미 -

「이나모리 가즈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니시노쿄하라마치에서 창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영세기업이었을 무렵부터 「조만간 이 하라마치 제일의 회사가 되자. 하라마치 제일이 되면 나카교쿠 제일이, 머지않아 교토 제일이 되자. 교토 제일이 되면 다음은 일본 제일이 되자. 일본 제일이 되면 이번에는 세계 제일이다」라는, 큰 꿈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1962년, 전부터 해외 시장에의 진출을 생각했었던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미국으로 첫 해외 출장을 했습니다. 1달러=360엔이었던 당시, 창업 4년째인 교세라에 있어서, 1개월에 이르는 이 해외 출장은 큰 부담이었지만,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꿈으로의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교세라의 기술력은 높이 평가되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수주로 이어주는 것까지는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해외 진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1964년 이번에는 유럽, 미국으로 건너가 정력적으로 영업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 해외로부터의 주문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순조롭게 수출이 증가하는 가운데, 1969년 미국에 교세라 최초의 해외 현지 법인, 교세라 인터내셔널 잉크(KII)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반도체 산업의 발흥기로, KII오피스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도, 반도체 비즈니스의 벤처기업이 모이는 실리콘 밸리의 일각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KII오피스에서의 영업 활동도 결실을 맺고, 또한 1969년의 멀티레이어 패키지 개발의 성공으로 인해, 교세라는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 메이커로부터 대량의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미국의 샌디에이고에서 현지 생산을 개시. 당초는 생산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현지 사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갭, 노동관의 차이 등, 익숙하지 않은 해외에서의 생산에 대단한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적자가 계속되어, 한때는 공장 폐쇄의 위기에도 빠졌습니다. 하지만, 현지 사원 속에 들어가 함께 문제를 해결해서 가자고 하는 일본인 간부의 한결 같은 모습에, 어느덧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결속이 탄생되어, 공장의 생산도 궤도에 오르게 끔 되었던 것입니다.

이 미국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교세라는 유럽이나 아시아로, 잇따라 사업을 확대하였습니다. 영세기업 이였던 창업당시 무렵부터, 큰 꿈을 그리고, 그 실현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하여, 교세라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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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이나모리 명예회장과의 관계
이나모리 명예회장과 우장춘 박사와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