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VALUE FRONTIER

쇼후공업 주식회사

1955년, 가고시마 대학을 졸업한 이나모리가 취직한 쇼후공업 주식회사는, 일찍이 일본을 대표하는 전력용 애자 메이커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실적이 침체해, 이나모리가 입사했을 무렵에는 언제 도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려운 경영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나모리는 제조부 연구과에 배속되어, 「특수자기」(현재의 파인 세라믹스)의 연구 개발에 종사하게 되었다.

일본 최초, 포스테라이트의 합성에 성공

일본 최초, 포스테라이트의 합성에 성공

쇼후공업에 취직해, 파인 세라믹스 기술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나모리는, 어느덧 1년 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포스테라이트의 합성에 성공하는 큰 연구 성과를 올렸다.
포스테라이트는, TV 등에 사용되는 고주파의 절연 성능이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나모리는 포스테라이트를 사용하여, 당시, 보급이 시작되는 여명기였던 TV의 브라운관 부품(U자 켈시마)을 개발했다. 이 U자 켈시마는 브라운관의 캐소드(음극)를 지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훗날 창업기의 교세라를 떠받치는 제품이 되었다.
이 포스테라이트는 당시의 브라운관 부품이나 저항심체 등의 재료로서 널리 사용되어, TV나 라디오, 카메라 등의 가전제품 보급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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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전기 터널로를 고안

독자적인 전기 터널로를 고안

U자 켈시마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서, 대량의 제품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이나모리는 종래의 배치식(※1.) 전기로를 대신하여, 연속 전기터널로를 고안했다. 제품을 올린 밑판이 푸셔에 의해 반송되는 방식으로, 그때까지 가(假) 소성, 본(本) 소성, 여열의 각 공정을 3개의 노를 사용하여 제품을 옮겨가면서 소성하던 것을, 하나의 노로 한꺼번에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하나의 설비로 어느 정도 통합된 공정(세라믹스의 소성이라면 가(假) 소성, 본(本) 소성 등의 공정)별로 처리를 구분하여, 원재료를 이 구분마다 합쳐서 투입하는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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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라 주식회사

1959년, 이나모리는 교세라 주식회사(창업시의 명칭, 교토세라믹 주식회사)를 창업, 세계를 대표하는 파인 세라믹 메이커로 길러냈다.
교세라 그룹은 현재, 각종 파인 세라믹 부품, 전자 디바이스 사업에 더해, 통신기기, 정보기기, 태양에너지 사업 등 다각화를 세계 각국에서 전개하는 기업그룹으로 성장하고 있다.
교세라는 창업 이래 60여년에 걸쳐 연간으로 한 번도 적자에 빠지는 일 없이, 높은 이익률을 항상 계속 유지하는 등, 기업 역사상 희유의 고수익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1959∼1963년

높은 목표를 가지고 교세라를 창업

높은 목표를 가지고 교세라를 창업

1959년 4월, 7명의 동료와 함께 교토 세라믹을 설립해, 이사 기술부장에 취임.
교토의 배전반 메이커인 주식회사 미야키 전기제작소의 한 구획에 있던 작은 창고를 빌려 창업했지만, 이나모리는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머지 않아 교토 제일, 다음에는 일본 제일, 언젠가는 세계 제일의 회사가 되자」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원들에게 큰 꿈을 계속 이야기했다. 그것이 사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일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켜 교세라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경영이념의 확립

교세라 창업의 목적은 「이나모리 가즈오의 기술을 세상에 묻는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업 3년째 봄, 전년에 채용한 신입사원이, 장래에 걸친 대우 보증을 요구하며 단체교섭을 신청해 왔다.
사흘 밤낮을 서로 이야기한 끝에 그들도 이해하여, 요구를 철회하고 회사에 남았지만, 이 일로, 이나모리는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현재는 물론, 장래에 걸쳐서도 종업원이나 그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 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험을 통해 이나모리는, 경영이란, 경영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기울여, 종업원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경영자의 사심을 떠난 대의명분을 기업이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거기서, 「전 종업원의 물심양면의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것을 경영이념의 서두에 내걸고, 더욱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인류, 사회의 진보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1항을 더하여, 교세라의 경영이념으로 했다.

경영이념

전 종업원의 물심양면의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류, 사회의 진보 발전에 공헌하는 것

회사의 발자취

1959년교토시 나카교구 니시노쿄 하라마치에 교토세라믹 주식회사를 창업
1960년종업원에게 증자분을 공로주로서 할당하여 전원이 주주가 된다
1961년고졸사원의 단체교섭을 계기로 경영이념을 확립
1962년미국으로의 첫 해외출장
1963년시가 가모 공장을 신설

사회의 움직임

1959년황태자 아키히토 친왕, 쇼다 미치코와 성혼
1960년로마올림픽 개최
1961년소련이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
1963년구로베 제4댐이 완성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알루미나 자기의 제품화

교세라 최초의 고순도 알루미나(파인 세라믹스의 대표적인 재료의 하나) 자기제품은, 브라운관의 캐소드를 지지하는 캐소드 튜브였다.
고순도 알루미나 자기는 포스테라이트 자기에 비해 소성 온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소성로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살두께가 극히 얇은 부품을 성형하는 새로운 성형법의 확립 등, 곤란한 과제를 극복하여, 이나모리는 이 고순도 알루미나 자기의 제품화 및 양산화에 성공했다.
이것을 계기로 알루미나 자기의 생산기술은 교세라의 발전을 지탱해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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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68년

아메바 경영을 고안

아메바 경영을 고안

1963년에 시가 가모 공장을 완성해, 니시노쿄 하라마치 본사공장과의 2공장 체제로 되었다. 이나모리는 규모가 확대되는 회사의 상황을 타임리하게 파악하기 위한 관리 회계 지표로서 「시간당 채산제도」를 1965년에 고안했다.
시간당 채산이란, 「매출을 최대로, 경비를 최소로」한다면, 그 차이인 부가가치도 최대로 된다는 경영원칙을 채산표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부가가치를 총 노동시간으로 나눈 것이 1시간당의 부가가치이며, 이것을 「시간당 채산」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사원들의 경영으로의 참여의식을 높이고, 그 힘을 결집해 가기 위한 구조로서, 이나모리는 독자적인 소집단 독립 채산제도인 「아메바 경영」을 만들어 냈다.
아메바 경영은, 조직을 세분화해서, 그것을 독립한 채산단위(아메바)로 해, 그 리더에 대해서 경영계획, 실적관리, 노무관리 등 경영 전반을 위임하는 것으로, 리더는 그것을 통해 경영자로서의 마인드와 능력을 몸에 익혀 갈 수 있다.
또한, 모든 경영 실적을, 아메바를 구성하는 전원에게 공개함으로써, 전원참가의 경영이 가능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회사의 발자취

1964년무역부를 발족시킴
1965년시간당 채산제도의 개시
1966년대표이사 사장에 취임
1967년이나모리의 경영철학이나 경영사상을 정리한 「교세라 필로소피 제1집」을 사원에게 배부함
1968년제1회 중소기업 연구센터상 수상

사회의 움직임

1964년도쿄올림픽 개최
1965년메이신 고속도로 전 노선 개통
1966년일본의 총인구가 1억명을 돌파
1967년EC(유럽공동체), 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이 발족
1968년오가사와라 제도가 23년 만에 일본에 복귀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IBM 「시스템/360」전용 IC용 서브 스트레이트의 개발

세계 최초의 범용 컴퓨터로서 일세를 풍미한 IBM사의 「시스템/360」의 심장부인 IC용 기판에 교세라제 알루미나 서브 스트레이트(기판)가 채용되었다.
이 기판은 재료기술, 가공치수 정밀도, 평면도, 표면조도 등 모든 면에서 당시 최고 레벨을 달리는 세라믹 기판이었다. 그 이후, 교세라제 알루미나 서브 스트레이트는 IC용 기판의 업계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파인 세라믹스 메이커로서 교세라는 널리 국내외 전기, 전자 메이커에 인지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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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73년

세계 최초의 IC용 세라믹 다층 패키지를 개발

세계 최초의 IC용 세라믹 다층 패키지를 개발

1960년대 초반, 미국 반도체 산업의 발흥기에, 이나모리는 파인 세라믹 기술을 응용하여,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세라믹 다층 패키지(용기) 개발에 착수했다. 테이프 성형 기술이나 동시 소성기술 등, 당시의 세라믹 기술의 상식을 넘은 새로운 생산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의해, 제품화에도 성공했다.
이 신제품이 가진 큰 장래성을 확신한 이나모리는, 대담한 설비투자를 결단해, 다양한 곤란을 극복하며, 세계 경쟁사에 앞서서 양산화에 성공했다. 교세라는, 그 후에도 고객 제일주의를 관철하여 급성장을 이루고, 세계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사카 증권거래소 시장 제2부에 상장

이나모리는, 교세라가 주식상장을 함에 있어, 어떤 방법이 가장 교세라에게 있어 바람직할지를 첫 번째로 생각했다.
통상적으로, 기업이 상장할 경우에는 3가지 방법이 있다.

  • 첫 번째는, 종래의 주주가 보유하는 주식을 시장에 방출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주주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 두 번째는, 회사가 신주를 발행하여 시장에 공개하는 방법으로, 상장시의 주식대금은 회사에 들어온다.
  • 세 번째는, 양자의 절충안이다.

이나모리는, 두 번째 신주 발행에 의해 상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상장시의 주식대금은 모두 교세라로 들어오고, 그 후의 적극적인 사업전개를 떠받치는 강고한 재무기반이 구축되었다.

회사의 발자취

1969년가고시마 센다이 공장을 개설하여, IC용 세라믹 다층 패키지의 양산을 개시
1971년샌디에이고(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첫 해외생산을 개시
교세라 페르드뮬레 일렉트로닉셰 바우에레멘테 GmbH(당시, 서독)를 설립
오사카 증권거래소 시장 제2부 및 교토 증권거래소에 주식 상장
1972년가고시마 고쿠부 공장을 개설
1973년월 매출총액 9억엔 달성 기념으로 사원을 홍콩 여행에 초대

사회의 움직임

1969년미국의 「아폴로 11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표면에 착륙
1970년오사카에서 일본만국박람회 개최
1971년달러 쇼크로 엔이 변동환율제로 이행
1972년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반환되어, 오키나와현이 발족
1973년제1차 오일쇼크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파인 세라믹스」를 명명 1973년

도자기나 애자와 달리, 세라믹스 중에서도 조성과 조직, 형상, 제조공정을 정밀하게 제어하여, 새로운 기능과 특성을 갖게 한 것을, 현재는 일반적으로 「파인 세라믹스」라고 부르는 것이 정착되어 있지만, 파인 세라믹스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이용한 것이 이나모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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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978년

오일쇼크와 고용 사수,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오일쇼크와 고용 사수,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1973년에 일어난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한 불황으로, 교세라의 수주고는, 10분의 1로 격감했다. 이 불황에 처하여 이나모리는, 고용을 사수하겠다고 선언한 뒤, 생산성 유지, 전원 영업활동, 신제품 개발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실행했다.
그럼에도, 수요의 침체는 계속되어, 창업 이래의 위기라고 판단한 이나모리는, 관리직의 임금삭감을 단행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에도 임금 인상의 동결을 제안하는 고뇌의 결단을 내렸다.
사원은 회사가 놓인 심각한 상황을 이해하고, 임금 인상의 일시 동결도 받아들여, 실적의 재건에 한마음이 되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원에게 이러한 자세가 생긴 것도, 창업 이래, 이나모리가 항상 사원들의 물심양면의 행복실현에 마음을 써 온 것을 사원들이 잘 이해함과 함께, 투명한 경영을 행하여 사원이 회사의 경영상황을 알게끔 해 온 것 이외에는 없다. 그 결단의 결과, 교세라는 그 후의 경기회복 국면에서 타사에 앞서서 실적을 회복하고, 이나모리는 이듬해의 승급에서 전년도 분도 포함한 대폭적인 승급을 실시함과 함께 임시상여금도 지급하는 등, 사원들의 노력에 보답했다. 이런 큰 시련을 계기로, 교세라의 기업 체질은 한단계 더 강화되어, 그 후에는 오일쇼크 이전보다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불황에 대한 마음가짐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나모리가 정리한 불황에 대한 예방과 대책

불황에 대비한 예방책:고수익이어야 한다
불황에 있어서 대책:①전원이 영업한다 ②신제품 개발에 최선을 다한다 ③원가를 철저하게 낮춘다 ④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 ⑤양호한 인간관계를 쌓는다

회사의 발자취

1974년「전자회로용 세라믹 적층기술의 개발」에 따라 1974년도 과학기술청 장관상 수상
1975년교세라의 주가가 일본 제일이 된다
재결정 보석 에메랄드를 「크레상 베르(CRESCENT VERT)」브랜드로 발매
1976년미국 예탁증권(ADR)을 발행
1977년세라믹 엔진을 개발하는 응용 기술연구소를 발족
1978년「단결정 사파이어질 세라믹스제 생체용 재료」가 과학기술청의 제38회 주목 발명으로 선정됨

사회의 움직임

1974년포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첫 방일
1975년프랑스의 랑부예 성에서 제1회 주요선진국 수뇌회담(랑부예 서밋) 개최
1976년록히드 사건 발발
1977년프로야구 왕정치 선수가 756홈런의 세계기록을 달성
1978년일중평화우호조약 조인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재결정 보석의 개발, 1975년

고도 경제성장을 거쳐 경제적인 풍요를 손에 넣은 일본에서는, 액세서리나 패션 등에 눈을 돌릴 여유가 점점 생겨 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반지나 목걸이 등의 보석장식품으로의 동경은 강했지만, 에메랄드나 루비 등의 양질의 천연석은 세계적으로 점점 부족하고, 고가의 것이었다.
이나모리가 파인 세라믹 기술을 응용하여, 천연석과 완전히 같은 조성과 구조의 재결정 보석을 세상에 내보내려고 결의한 것은,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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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983년

사이버넷 공업, 야시카를 잇따라 매수

사이버넷 공업, 야시카를 잇따라 매수

이나모리는 1979년에 통신기기 메이커인 사이버넷 공업 주식회사를, 1983년에는 카메라 메이커인 주식회사 야시카를 잇따라 매수했다.
어느쪽도의 매수도 구제요청이 있어 행해진 것이였다.
이나모리는 그 이전부터 다각화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자기기나 카메라 사업으로의 참여는, 세라믹 기술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업종으로의 전개였던 만큼, 리스크도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나모리는, 직원을 도와달라는 상대경영자의 진지한 마음과, 장래에 대한 불안이 있으면서도 성실하고 한결같이 일하는 사원들의 자세에 감동받아, 어떻게든 도와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매수를 결심했다.
매수 후에는 과격한 노동조합에 고뇌한 적도 있었지만, 상대기업의 사원을 구하겠다는 일심으로 양사의 경영을 재건시켰다.
그 후, 이 두 회사의 인재가, 교세라 통신기기 사업의 중핵을 짊어지고, 또한 다이니덴덴의 설립에서 활약하는 등 교세라 그룹 발전의 큰 힘으로 되었다.

公司历程

1979년통신기기 메이커인 사이버넷 공업 주식회사를 매수
1979년창립 20주년과 월 생산액 50억엔 달성을 기념하여, 사원을 싱가포르 여행에 초대
1980년뉴욕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
1981년태양전지를 단독전원으로서 민생용으로 상품화한 최초의 상품 「포터블형 태양전지SB-Ⅱ」를 발매
1982년교세라와 이스즈자동차 주식회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세라믹 엔진 카의 시주행이 NHK에서 방영되어, 파인 세라믹스 붐을 일으키다.
회사명을 종래의 교토 세라믹에서 교세라로 변경.
1983년카메라 메이커인 주식회사 야시카를 매수

사회의 움직임

1979년미국과 중국이 30년 만에 국교를 회복
1981년엔고가 진행되어 처음으로 1달러=200엔을 깨다
1982년포클랜드 분쟁 발발
1983년도쿄 디즈니랜드를 오픈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세라믹 엔진의 개발

미국이나 일본에서, 내연기관의 효율향상이 연구되기 시작한 것에 대응해서, 이나모리는 디젤 엔진이나 가스터빈에 파인 세라믹스 응용을 생각했다.
고온에 강한 질화규소를 이용해, 독자적인 성형법을 고안하여 실린더나 피스톤, 헤드 플레이트 등을 모두 세라믹화 한 올 세라믹스의 무냉각 엔진을 설계했다. 이 엔진을 탑재한 이스즈 자동차의 「제미니」가 질주하는 모습이 1982년 NHK 설날 프로그램에서 전국에 방송되자, 세계 최초로 「도자기 엔진으로 차가 달렸다」라고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파인 세라믹스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일거에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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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88년

사원에게 주식을 선사해, 사원 모두를 교세라의 주주로

사원에게 주식을 선사해, 사원 모두를 교세라의 주주로

이나모리는 창업 이래, 경영으로의 참여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도, 사원이 교세라의 주식을 가질 것을 장려해 왔다. 주식 상장 후에는 자사주 투자회를 설립하였는데, 주가가 높은 교세라의 주식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4년 4월 1일에 교세라가 창립 25주년을 맞이했을 때, 이나모리는 사반세기에 걸친 사원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3박 4일의 도쿄여행을 실시했다. 그 여행 중에 행해진 창립 기념식전 후의 파티 석상에서, 이나모리는 사원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자기가 보유한 주식의 일부를 전사원에게 선사했다.
그것은 사원의 오랜 수고를 위로함과 함께, 전 사원이 교세라의 주주가 됨으로써, 경영으로의 참여의식을 갖고 일에 임해 달라는 바람에서였다.

회사의 발자취

1984년「대규모 집적회로용 세라믹 적층기술의 개발」로 자수포장을 수장
1985년쓰쿠바시에서 개최된 「국제과학기술박람회」에 출전
(교세라의 금세라가 공식기념메달의 소재로 적용됨)
1986년대표이사 회장 겸 사장에서 대표이사 회장 전임으로 되다
1987년태양전지를 생산하는 재팬 솔라 에너지 주식회사를 합병
1988년독일에 유럽통괄회사인 교세라 유럽 GmbH를 설립

사회의 움직임

1984년NHK가 위성방송을 시작
1985년국제과학기술박람회 「과학만국박람회 쓰쿠바박람회」개막
1986년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원자로 폭발이 일어남
1987년뉴욕시장에서 주가 대폭락(블랙먼데이)
1988년서울올림픽 개최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세라믹스 생체재료의 개발

세라믹스의 우수한 생체 적합성에 착안한 이나모리는, 세라믹스를 응용하여 인공치근이나 고관절, 무릎관절 등의 인공관절을 개발했다. 단결정 사파이어나 지르코니아 세라믹스를 원재료로 한 세라믹스의 생체재료는 널리 이용되어, 많은 환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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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3년

국가를 초월한 주식교환을 실현, AVX사(미국)를 매수

국가를 초월한 주식교환을 실현, AVX사(미국)를 매수

1990년, 전자부품 사업을 세계규모로 강화하기 위해서, 미국의 대형 전자부품 메이커인 AVX사를 교세라 그룹에 영입시켰다.
그 때, 외국기업과의 사이에서의 주식교환이라고 하는, 이제까지 일본에는 전례가 없었던 방법으로 매수를 실현했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상법상의 이유로 외국기업과의 주식교환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나모리는 법률의 취지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여, 행정당국과 끈질기게 교섭하여, 실현한 것이다.
상식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왜, 어째서라는 의문을 갖고 파고들어 감으로써, 그때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것을 실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AVX사의 경영에 있어서도 이나모리는, 동사의 경영진에게 경영을 맡기는 한편,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관철한다」라는 기업의 이념, 철학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해와 공유를 위해 노력했다. 동사는 매수 후 5년이 채 안 되는 단기간에 뉴욕증권거래소로의 재상장을 이루어 내고, 그 후에도 순조롭게 성장발전을 이루고 있다.

회사의 발자취

1989년미국의 커넥터 메이커인 엘코 그룹을 매수
1990년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서 「교세라 기술전」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최
1991년교세라 환경헌장을 제정
1993년업계 최초로 주택용 태양광발전 시스템을 발매

사회의 움직임

1989년쇼와 천황폐하가 승하하여, 새 연호가 헤이세이로 정해지다
1990년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독일이 서독일에 편입되어, 통일 독일이 탄생
1991년이라크에서 걸프전쟁 발발
1992년학교 주5일제 시작
1993년세계 최대의 경제권 EU(EC통합시장)를 발족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장식용 세라믹스

고온에서 소결된 알루미나 세라믹스는 아름다운 투광성을 가진다. 그러한 세라믹스가 가진 “미”에 주목한 이나모리는, 창업 당시부터, 파인 세라믹스를 장식품이나 예술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없을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1974년에는 아름다운 광택의 빨강과 파란색의 다결정 알루미나를 개발했다.
거듭 개량을 되풀이한 결과, 보다 투명도가 높고, 선명한 소재를 개발한 이나모리는, 거기에 독일 마이센사의 채색을 한 「이나모리 컬렉션 마이센 디자인」, 사쓰마 도자기의 채색을 한 「옥자」등의 공예품을 만들어 내었다.
현재에는, 장식용 세라믹스 제조기술을 응용하여 고급시계용 케이스나 베젤, 휴대전화의 푸시 키, 카메라 부품 등에도 금, 은, 흑, 백, 갈색 등의 컬러 세라믹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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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8년

미타공업의 재건을 성공시키다

미타공업의 재건을 성공시키다

1998년, 복사기의 중견 메이커였던 미타공업 주식회사가 도산하여, 구제를 요청받은 이나모리는 재건을 맡았다. 방만 경영과 디지털화로의 대응이 늦어져 경영 위기에 처한 가운데, 회사를 존속시키고, 사원을 지키고 싶다, 또한 미타공업의 제품을 취급해 온 판매대리점이나 유저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당시의 사장은 회사갱생법 신청을 단행하여, 이나모리에게 구제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이나모리는 그 생각을 받아들여, 동사에서 일하는 사원을 구제하고 싶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맡았다. 교세라의 전면적인 지원을 얻어, 동사는 회사명도 교세라 미타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단기간에 실적을 회복시켜, 갱생 계획을 7년이나 앞당져, 2002년 3월 말에 종료시켰다.
그 후, 교세라 프린터 사업과의 사업통합을 행하여, 현재는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주식회사로서, 착실한 성장을 해 나가고 있다.

회사의 발자취

1994년J리그에서 뛰는 프로 축구팀을 육성하여, 교토의 활성화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교토 재계의 중심이 되어 주식회사 교토 퍼플상가를 설립
1995년교토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1996년주식회사 교세라 솔라 코퍼레이션을 설립
1997년교세라 대표이사 회장직을 물러나, 이사 명예회장이 되다
1998년교토시 후시미구 다케다에 교세라 본사 빌딩이 완성

사회의 움직임

1994년간사이 국제공항 개항
1995년WTO(세계무역기구)를 발족
1997년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
1997년동경만 아쿠아라인이 개통
1998년나가노현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 개최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어모퍼스 실리콘 드럼의 개발

이나모리는, 플라즈마 CVD법의 기술을 복사기, 프린터의 감광체에 응용할 것을 목표로 어모퍼스 실리콘 감광 드럼의 개발에 착수했다.
대면적의 하자가 없는, 균일한 막을 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5년간의 개발을 거쳐 1984년에 양산화에 성공하고, 전자사진방식 복사기의 심장부로 사용되게 되었다.
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제품의 특징은 긴수명, 고감도, 고내열성으로 친환경적이라는 어모퍼스 실리콘 감광 드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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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8년

태양 에너지의 사업화에 성공

태양 에너지의 사업화에 성공

이나모리는, 오일쇼크의 여운도 채 가시지 않은 1975년, 석유가 고갈된다는 세계적 에너지 위기의 극복에 자사의 기술로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태양전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오일쇼크 후에는 석유의 수급이 완화되어, 대체 에너지 개발의 기운이 급속도로 저하되었기 때문에, 태양전지 시장은 긴 침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각국의 연구 개발 예산도 축소되는 가운데 연구나 사업에서 철수하는 기업도 잇따랐다.
이와 같은 곤란한 시대에서도 이나모리는, 태양광 발전을 통해서 세상에 공헌한다는 신념을 바꾸는 일 없이, 보다 고효율의 태양전지 개발과 다양한 용도개발을 행하여 태양전지의 보급 확대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힘든 시대는 대략 사반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재생가능 에너지의 이용을 촉진하는 정책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부터 사업환경은 호전되기 시작, 태양전지 시장에 있어서 교세라는 세계적인 메이커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것이었다.

회사의 발자취

2000년교세라 미타 주식회사(현・교세라 도큐먼트 솔루션스 주식회사) 발족
2001년KII를 통해 프린트 배선 기판용 드릴 전업 메이커, 타이컴 코퍼레이션(미국)을 매수
2002년도시바 케미컬 주식회사를 매수하여, 교세라 케미칼 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2003년교세라(톈진) 상무유한공사(현 교세라(중국) 상무유한공사), 교세라(톈진) 태양능유한공사를 설립
2004년일본 메디컬 머티리얼 주식회사를 설립
2005년가고시마 대학에 이나모리 경영기술 아카데미(현 이나모리 아카데미)를 개설
2006년교세라 한국 주식회사를 설립
2008년산요전기 주식회사로부터 휴대전화 사업을 승계

사회의 움직임

1999년유럽 단일통화 「유로」 탄생
2000년시드니 올림픽 여자마라톤에서 다카하시 나오코가 일본 여자육상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
2001년미국 동시다발 테러사건 발생
2003년일본 우정공사 발족
2006년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이 세계 제일이 되다
2008년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세계적 대불황이 일어나다

기술자로서의 이나모리

태양전지의 개발

석탄이나 석유 등 유한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근대 사회의 장래를 우려한 이나모리는, 재료기술이나 결정기술을 살려 태양전지 개발에 착수. 일본에서 최초로 무선중계국의 전원용 태양전지를 상품화하였다. 그 후, 당초의 EFG법에 의한 리본 결정 태양전지에서, 보다 생산성이 높고, 코스트 퍼포먼스가 좋은 주조법에 의한 다결정 실리콘 태양전지의 개발을 추진하여, 발전효율을 계속 향상시킴으로써 태양전지의 보급을 지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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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라 창업으로부터의 실적 추이(연결)

교세라 창업으로부터의 실적 추이(연결)

이 그래프는, 교세라 창업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실적 추이를 나타내며, 매출을 초록, 세전이익을 파랑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업시부터 한번도 적자결산을 낸 적이 없으며, 다양한 경영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대체로 10%를 넘는 이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왼쪽 아래 그래프는, 창업에서부터의 10년간을 발췌한 것으로, 1966년에는 IBM의 서브스트레이트(알루미나 기판)의 수주가 공을 세워, 그 이후, 빠른 속도로 매출이 늘고 있다.
창업 1년째는, 매출 2600만엔, 이익은 300만엔.
창업시부터 이나모리는, 니시노쿄 하라마치에서 첫 번째, 다음은 교토 제일, 일본 제일,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하자고, 입버릇처럼 사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득하고, 실제로 세라믹 메이커로서는, 세계 제일이 되었다. 항상 꿈을 품고, 포기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고, 목표를 계속 추구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나모리의 생각을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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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DI 주식회사

1984년의 전기통신사업의 자유화 결정에 의해 민간기업이 통신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이나모리는 다이니덴덴 기획 주식회사(다이니덴덴 주식회사의 전신)를 설립하여 통신사업에 참여. 장거리전용 서비스, 시외전화 서비스, 셀룰러 각사에 의한 휴대전화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다이니덴덴(DDI)을 후발 통신업체 3사 중 톱, 국내 대형 통신사로 키워냈다. 게다가, 2000년에는 다이니덴덴, KDD(국제전신전화 주식회사), IDO(일본 이동통신 주식회사) 3사 통합을 실현하여, KDDI주식회사 설립으로 이끌었다.

1984∼1987년

『동기는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통신사업에 참여

『동기는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통신사업에 참여

일찍이 일본의 전화요금이 비싸 국민생활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던 이나모리는, 1984년에 전기통신사업의 자유화가 결정되었을 때, 민간기업이 모조리 이 분야에 참여하여 국민을 위해서 장거리 전화요금을 저렴하게 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거대한 NTT에 대항하는 것은 큰 리스크를 수반하기 때문인가, 신규 참여하려는 기업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나모리는, 이 사업은 벤처로 출세하여, 기업경영을 통해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도움이 되려는 철학을 가진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아닐까라고 생각하여, 통신사업으로의 참여를 결의했다.
이나모리는, 전기통신 사업에 진출하려는 것은, 국민을 위해서 전화요금을 저렴하게 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인가, 그 동기에는 한점의 의심도 없는가, 라고 하는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동기는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라고 반년 가까이 고민한 끝에, 동기는 선하며 사심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나모리는, 다이니덴덴를 설립해, 아무리 곤란한 사업일지라도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 내겠다는 불퇴전의 결의를 굳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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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전화 서비스로 반격에 성공

시외전화 서비스로 반격에 성공

기업이나 단체향 전용 서비스에서는, 대주주나 대기업, 관청과 같은 큰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다이니덴덴은 힘든 고전을 강요당했다.
이대로는 사업을 궤도에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 이나모리는, 시외전화 서비스가 시작되는 것을 기회로, 「전기통신에서 올바른 경쟁을 일으켜 국민을 위해 전화요금을 내린다」라는 창업의 원점으로 되돌아와, 재빨리 활동의 중점을 종래의 전용 서비스에서 일반시민향 시외전화 서비스로 전환했다.
두 경쟁사에 앞서서 시외전화 서비스 전임 영업조직을 만들어, 인재를 그쪽으로 돌려, 활발한 영업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87년 9월의 시외전화 서비스 개시 때에는, 두 경쟁사가 각각 27만 회선과 15만 회선이었던 것에 대해 다이니덴덴은 45만 회선으로 압도적인 회선 수를 획득한 것이었다. 시외전화 서비스에서의 성공으로 다이니덴덴 사업은 성장 궤도에 올라, 통신업체의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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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92년

휴대전화 시대를 예측하여 이동체 통신사업에 참여

휴대전화 시대를 예측하여 이동체 통신사업에 참여

당시, 이동체 전화에서는 자동차전화가 주류였고, 전파법 제약으로 NTT의 독점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반도체 등 부품의 소형화 기술이 진척되어, 머지않은 장래, 휴대전화도 소형화되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측했던 이나모리는, 다이니덴덴 설립 당초부터 이동체 통신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1986년 8월에 이동체 통신의 자유화가 결정되는 즉시 참여를 표명했다. 이 때, 이나모리가 시야에 넣은 것은 기존의 자동차전화가 아닌, 한사람 한사람이 들고 다니는 현재의 휴대전화였다. 그러나 참여를 하려 하자, 주파수의 제약부터, 동일지역에서는 NTT 이외에는 1사밖에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고속통신 주식회사와 다이니덴덴으로 서비스 지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이 조정은 사업의 존망에도 영향을 주는 만큼 난항을 거듭하여,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정이 안되어 불이익을 받는 것은 국민뿐이라고 생각한 이나모리는, 가장 많은 이용이 예상된 수도권과 중부 도카이권을 일본고속통신에 양보하고, 그 외의 지역을 다이니덴덴이 서비스 지역으로 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나모리에게는 본의 아닌 마무리였지만, 국민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동체 통신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이동체 통신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에 뿌리내린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나모리는, 각 지역에 셀룰러 사업회사를 설립하고, 거기에 전력회사 등 지역의 유력기업에서의 출자를 받아, 사업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 전략이 성공하여, 셀룰러 사업은 순조로운 실적을 늘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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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7년

신덴덴 3사 중 수위를 차지하며 주식을 상장

신덴덴 3사 중 수위를 차지하며 주식을 상장

1993년 9월 3일, 다이니덴덴은 신덴덴 3사 중 수위를 차지하고 당시의 도쿄증권거래소 시장 제2부에 상장을 이루었다. 전신인 다이니덴덴 기획의 설립으로부터 9년, 사업회사로 이행하고 나서 8년이라는 단기간의 상장이었다. 시장의 기대도 커서, 370만엔의 공모가격에 대하여 상장 첫날 주가는 550만엔에 달했다. 상장은 다이니덴덴에 있어, 자금조달력의 향상, 사회적인 인지도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사원도 또한 상장을 계기로 자사로의 긍지와 의욕을 한층 높여, 사업에 매진했다.
상장에 앞선 1987년 11월, 이나모리는, 사원 한사람 한사람이 「경영자」라는 의식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바람과, 창업 이래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희망하는 사원에게는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때의 이나모리 자신은, 일본의 전화요금을 저렴하게 하고 싶다는,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로 참여했다는 생각에서, 자신은 주식을 갖지 않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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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현재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소이를 버리고 대동을 취한다 ∼KDDI의 탄생∼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소이를 버리고 대동을 취한다 ∼KDDI의 탄생∼

통신 자유화는 실현되긴 했지만, 1999년 당시의 통신 시장은 아직도 NTT 그룹이 여전히 압도적인 힘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이나모리는 전부터, 거대한 NTT대 신덴덴(후발 통신업체) 각 사라는 구도로는 진정한 통신 자유화를 실현할 수 없다, 일본의 통신업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NTT로의 확고한 대항축이 불가결하다는 굳은 신념을 품고, 다른 통신사와의 통합 기회를 찾고 있었다. 거기에 국제전화사업의 KDD, 휴대전화사업회사 IDD와의 합병이라는 이야기가 대두되었다. 실제로 합병 교섭에 들어가자 각 회사의 다양한 생각과 생각의 차이도 있어, 교섭은 곤란이 극에 달해, 몇 차례나 좌절되었지만, 이나모리는 「3사가 하나가 되어 NTT에 대항하지 않으면, 일본의 참된 통신 자유화는 없다」라는 신념에 기초하여, 통신 자유화의 중요성과, 3사가 다해야 할 역할에 대해 끈질기게 설득하여, 「소이를 버리고 대동을 취한다」라는 높은 이상에 근거한 기업통합으로 이끌었다.
3사 합병에 있어서는, 경영 책임의 명확화나 의사결정의 신속화 등, 경영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대등합병이 아니라 다이니덴덴을 중심으로 한 3사 통합을 실현하였다. 그것이 그 후의 KDDI 약진의 주요 요인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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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 주식회사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항공수송을 짊어질 국책회사로서 반관반민 체제로 스타트를 끊은 일본항공은, 오랫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항공사였다. 그러나, 1991년의 버블 붕괴 이후의 수요 하강을 계기로 실적이 침체하여, 2010년 1월에 회사갱생법 적용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나모리는 정부로부터 동사의 경영 재건을 거듭 요청받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취임 후, 이나모리는, 경영간부에서 현장사원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의식개혁과, 아메바 경영에 의한 사원의 채산의식을 향상시킴으로써 단기간에 재건, 수익성이 높은 항공사로 이끌었다.

일본항공 재건을 수락하다

일본항공 재건을 수락하다

일본항공은 장기간에 걸친 실적의 부진으로 인해 재무체질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정부는, 이후 더욱 격화되는 국제적인 항공경쟁 속에서, 일본의 항공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사의 발본적인 개혁이 불가결하다고 여겨, 갱생법을 적용하여 동사를 재생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동사 재생을 맡길 경영자로서 선정된 것이 이나모리였다. 이나모리 자신은, 그 소임에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재삼 고사했지만, 최종적으로는,

  • ①일본경제 쇠퇴의 상징이었던 일본항공을 재건함으로써, 국민이 일본경제도 재생할 수 있다고 자신을 되찾는다
  • ②일본항공에 남겨진 사원을 도와, 고용을 유지한다
  • ③일본항공의 재건으로 경쟁원리가 작용하여, 저렴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한다,

라는 3가지 대의를 바탕으로,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장에 취임했다.
회장취임에 즈음해서는, 고령이고, 또 다른 일도 있기 때문에, 100% 전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수는 일체 받지 않고, 경영재건에 임했다.
당시, 많은 매스컴은, 오랜 세월에 걸친 방만경영적인 기업 체질과 복잡한 조합 문제, 또 사업의 대폭적인 축소와 브랜드 이미지의 치명적인 훼손 등으로, 재건은 불가능하며, 2차 파탄은 필연적 이라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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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개혁의 대처

의식개혁의 대처

이나모리가 경영 파탄의 원인으로서 통감한 것은 경영간부의 리더로서의 자각 결여였다. 의식개혁 없이 일본항공의 재건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 이나모리는, 먼저 간부사원의 의식개혁에 착수했다.
2010년 6월, 약 50명의 간부를 모아, 「인간으로서, 또 집단의 리더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17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한편, 하네다나 나리타 등의 주요공항에 가서 운항부문, 객실부문, 정비부문, 공항부문의 현장사원에게, 일에 대한 사고방식을 직접 설파해 갔다. 당초에는 위화감이나 반발심을 갖는 간부나 사원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얘기해 가는 동안, 사원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어 갔다.
게다가, 이나모리의 경영철학을 베이스로, 사원의 판단이나 행동의 규범이 되는 「JAL필로소피」를 만들어, 전사원이 공유하도록 노력한 결과, 고객에 대한 서비스 의식의 향상과 부문을 넘어 서로 협력하는 일체감, 사원 한사람 한사람이 주체적으로 생각하여 행동하는 자세 등이 일본항공 내에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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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성 개선으로의 대처

채산성 개선으로의 대처

취임 당초의 이나모리의 눈에는, 일본항공에서는 채산성 의식이 희박해서, 대부분의 간부나 사원들이 경영수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서, 아메바 경영을 베이스로 노선별 수지 및 노편별 수지를 즉석에서 파악하여, 필요한 대책을 취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여, 노선별 책임자를 정하고, 그 책임자가 중심이 되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아메바 경영에 기초하여 일본항공의 독자적인 관리회계 구조를 만들어, 각 부문의 경영실적을 단기간에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 또, 각 본부나 관련회사의 책임자가 자부문의 경영실적을 발표하는 「실적보고회」를 매월 개최하기로 했다.
책임자가 자부문 경영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여, 개선책을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각 부문의 채산성은 향상되어 갔다. 또한, 사원의 코스트에 대한 의식도 높아져, 전사원이 채산개선에 주체적으로 임하게 되어, 수익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원이 공유해야 할 명확한 경영철학을 「JAL필로소피」로서 정리하여, 그것을 베이스로 사내 의식개혁을 추진함과 함께, 아메바 경영을 도입하여 채산성 향상에 임함으로써, 실적, 재무체질은 급속히 개선되었다.
일본항공은 세계의 대형 항공사 중에서도 가장 수익성이 높은 항공사로 다시 태어나, 2012년 9월 19일에는 상장폐지로부터 2년 7개월이라는 역사상 최단기간에 주식의 재상장을 이루었다.
오른쪽 그래프는, 이나모리 취임 전후의 실적을 나타낸다. 취임 전의 매출은, 약 1조 5천억엔, 영업이익은 -1,337억엔이라는 거액의 적자를 계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매출 1조 3,622억엔으로 감소하긴 했지만, 영업이익은 1,884억엔으로 V자 회복을 이루었다. 더욱이 그 이듬해에는 매출 1조 2,048억엔, 영업이익은 2,049억엔으로 17%의 이익률로 되어, 고수익 항공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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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철학

아메바 경영

아메바 경영

아메바 경영이란 이나모리가 교세라를 경영해 나가는 가운데, 그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경영관리 수법이다.
조직을 소집단으로 나누고, 시장에 직결된 독립 채산제에 의해 운영하여, 경영자 의식을 가진 리더를 사내에 육성하고, 전 종업원이 경영에 참여하는 「전원 참가 경영」을 실현하는 경영 수법이다.

아메바 경영에는 필로소피를 빠뜨릴 수 없다

아메바 경영은, 세간에서 인기가 있는, 경영 노하우는 아니다. 아메바 경영은 하는 방식을 흉내내도, 잘 기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경영철학」을 베이스로 하여, 회사 운영에 상관한 모든 제도와 깊게 관련하는 「토탈 경영 관리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경영자 의식을 가지는 인재의 육성

조직을 「아메바」라 불리는 작은 조직으로 분할함으로써, 회사를 중소기업의 연합체와 같은 구성으로 한다. 각 아메바 경영을 리더에게 맡김으로써, 경영자 의식을 가진 인재를 육성한다.

  • ①큰 조직을 「아메바」라 불리는 소집단으로 나눈다
  • ②아메바마다 리더를 임명하고, 경영 계획, 실적 관리, 노무 관리, 자재 발주 등의 경영 전반을 맡기고, 공동 경영자로서의 동료를 늘린다

     ↓

  • ・스스로 도전하는 조직풍토
  • ・목표를 달성하는 풍토 만들기
  • ・타임리하고 동시에 정확한 경영 판단

시장에 직결한 부문별 채산제도의 확립

회사경영의 원리원칙은, 매출을 최대로 하고 경비를 최소로 해 나가는 것이다. 이 원칙을 전사에 걸쳐서 실천해 가기 위해, 작은 조직 「아메바」로 나누고, 시장의 움직임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부문별 채산 관리를 행한다.

  • ①경영의 원리원칙= 「매출최대, 경비최소」에 의해 이익을 추구한다
  • ②아메바를 독립 채산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메바 간에서 매매를 발생시킨다
  • ③전 사원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계부 같은 채산표를 작성한다

     ↓

  • ・보다 작은 단위의 경영 과제가 명확해진다
  • ・회사 구석구석까지 실태가 잘 보인다
  • ・사원의 채산 의식이 높아진다

전원 참가 경영의 실현

전 종업원이, 축제 가마를 짊어지듯 회사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아 경영에 참가하고, 사는 보람과 성취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전원 참가 경영」을 실현한다.

  • ①아메바 단위로 계획을 세워, 목표를 공유화한다
  • ②회사방침과 목표를 토대로 연도 계획(마스터플랜)을 세운다
  • ③마스터플랜을 토대로 월차 예정을 세워, 실적관리를 행한다

     ↓

  • ・현장의 중지가 모인다
  •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달성감과 하는 보람을 느낀다
  • ・직장의 일체감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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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라 회계학

교세라 회계학

교세라를 창업했을 당시, 기술자 출신의 이나모리는, 경영이나 회계에 대해서 자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회사를 시작하자마자, 이나모리는 다양한 경영상의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요구받았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해야만 하는가, 고민을 매일 같이 하던 가운데, 이나모리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베이스로 판단해 나가자고 결의하였다.
이것은, 회계 분야에 있어서도 같았다. 다양한 회계상의 문제에 부딪쳐도, 항상 그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 「무엇이 올바른가」를 베이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일반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회계의 본질에 근거한 「교세라 회계학」을 만들어 내었다.

회계는 경영의 나침반

회계 수치는, 비행기의 콕피트에 있는 계기반의 수치에 비유할 수 있다. 파일럿이, 고도나 속도, 방향 등을 나타내는 계기반의 숫자를 보면서, 비행기를 조종하듯이, 경영자는 회계 숫자를 봄으로써 회사의 실태를 간파하면서, 경영의 지휘를 행한다.
만약, 비행기의 “계기반”이 이상해지면, 올바르게 비행할 수 없듯이, 회계 숫자가 대충 맞는다면, 회사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회계란, 기업 경영에 있어서 “나침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며, 「경영의 중추」라 불릴 만큼 중요한 것이다.

교세라 회계학 7가지의 기본 원칙

교세라 회계학에서는, 경영 실태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발전으로 이끌기 위해 실천적인 「7가지의 기본 원칙」을 내걸고 있다.

1 캐시 베이스 경영의 원칙

「캐시 베이스 경영의 원칙」이란, 「돈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심플한 경영을 행하는 것이다. 현대의 회계학은, 점점 복잡화되어 가고 있어, 경영 실태를 알기 어렵게 되고 있다. 경영의 실태를 올바르게 전달한다는 회계의 원점으로 돌아가면, 가장 중요한 「캐시」에 착안하여, 그것을 베이스로 해서 올바른 경영 판단을 해야만 한다.

2 일대일 대응의 원칙

회사 경영에 있어서는, 반드시 물건과 돈이 움직인다. 그 때, 물건 또는 돈과 전표가, 반드시 일대일의 대응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칙을 「일대일 대응의 원칙」이라 부르고 있다. 이 원칙을 철저히 함으로써, 매일의 전표 숫자의 누적이, 그대로 회사 전체의 실제 모습을 비추는 숫자가 된다.

3 근육질 경영의 원칙

기업을 사람의 몸에 예를 든다면, 군살(쓸데 없는 자산 등)이 전혀 없는 건전한 「근육질 기업」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을 「근육질 경영의 원칙」이라 부르며, 교세라 회계학의 중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완벽주의의 원칙

「완벽주의의 원칙」이란, 타협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할 것을 지향하는 것이며, 경영에 있어서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다. 특히 회계에 있어서는 100% 올바른 숫자가 요구된다.

5 더블 체크의 원칙

「더블 체크의 원칙」은, 경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사람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보호 메커니즘」의 역할을 다한다. 전표 처리나 입금 처리를 한사람이 아닌 반드시 복수의 사람들이 체크한다는 더블 체크 시스템은, 업무의 신뢰성과, 회사 조직의 건전성을 지키는 것이 된다.

6 채산 향상의 원칙

기업 회계에 있어서, 자사의 채산 향상을 지탱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사명이다. 교세라에서는, 「아메바 경영」이라 불리는 소집단 독립 채산 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전 종업원이 채산 향상에 공헌하고 있다.

7 투명 경영의 원칙

경영자와 사원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회사가 놓여 있는 상황을 숨기지 않고 사원에게 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경영을 「투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 경영자뿐만 아니라, 사원에게도 자사의 상황이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회사는 주주, 투자가 등의 외부 관계자에게도 자사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만큼 외부에 대한 공정한 디스클로저가 불가결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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